90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고 건강한 신기명 박사. 사진=윤석룡

강화 시니어들에게 10년째 무료 영어교육…“어르신들, 이제 자신을 위해 투자하세요”

[공동취재=윤석룡·김정자 기자]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세광1차아파트에 사는 백발의 90세 여성이 매주 영어책을 펼쳐 든다. 강의실은 선원교회다. 매주 화요일이면 시니어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고, 금요일에는 온라인으로 영어성경을 가르친다. 그렇게 이어온 세월이 어느덧 10년이다.

주인공은 영어교육 전문가인 신기명 박사(90)다. 그는 영어교육서를 집필하며 오랫동안 영어교육에 힘써온 인물이다. 자신이 터득한 영어 학습법을 책으로 펴내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고, 여러 종류의 영어교육서를 출간했다.

하지만 90세의 나이에도 책상 앞에 앉아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그의 모습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나눔’이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혼자 간직하지 않고 지역의 시니어들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수업에서는 영어 동화와 소설 등을 함께 읽는다. 전원곤(91, 선원면) 씨는 “1년 동안 ‘장화 신은 고양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노인과 바다’ 등을 배운 것이 너무 기뻤다”며 “강의실을 빌려주시고 냉난방까지 제공해 주신 선원교회 목사님께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7년 전 강화로 귀촌한 김종수 씨도 “50여 년 만에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며 “더 열심히 영어를 배우고 싶다. 연세가 많으신 데도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시는 신 박사님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신 박사의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을 겪으며 아버지의 고향인 충북 보은으로 피난을 떠났다. 제대로 교육받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다. 결국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쳤다.

결혼과 육아로 교직을 그만둔 뒤 그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다. 30대 무렵 학창 시절 사 모았던 영어소설을 읽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영어학원에 다녔지만 암기 위주의 교육에 한계를 느꼈다. 그는 스스로 영어를 공부하며 문법의 원리를 찾아갔다. 여기에 교육심리학을 접목해 자신만의 영어교육 방법을 정립했고, 이를 책으로 펴냈다.

그는 “영어의 원리를 스스로 파악하고 나니 영어가 훨씬 재미있어졌다”며 “제가 지도한 학생들이 영어를 재미있어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제가 쓴 책이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특히 그가 강조하는 영어 공부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영어 교과서를 완전히 익히고 이후에는 수학 공부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영어와 수학을 잘하면 대학입시도 수월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80세에는 60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사별하는 큰 슬픔도 겪었다. 그는 “오른쪽 팔 하나가 없어진 것처럼 큰 충격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건강까지 나빠져 이석증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영어였다.

“영어가 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었어요. 영어를 공부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았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화에 정착한 것도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자동차 매연에 민감해 숨쉬기조차 어려웠던 그를 위해 아들이 여의도에서 가까운 공기 좋은 곳을 찾았고, 그렇게 인연을 맺은 곳이 강화였다. 강화에서 몇 달을 생활하면서 호흡이 편안해지고 건강도 회복됐다.

현재 그는 책 한 권을 집필하면서 일주일에 두 차례 영어를 가르치고, 매일 걷는다.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영어를 가까이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취미”라는 그의 말에서 90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보인다.

그의 봉사활동은 영어교육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파트 산책로에 의자를 설치해 주민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하는 등 주변의 어려운 이웃과 주민들을 위한 작은 선행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분명하다. 강화에 정착한 결혼이주여성들의 자녀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 아이들이 영어만 잘해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워요. 어느 기관이나 단체에서 아이들을 모아준다면 기쁜 마음으로 영어교육 봉사를 하고 싶습니다.”

신 박사가 특별히 고마움을 전한 사람은 전원곤 장로다. 그는 “20년 이상 가까운 곳에서 든든하게 도와주신 흑기사 같은 분”이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강화의 시니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따뜻했다.

“평소 해보고 싶었지만 못 해본 일을 해보세요. 이제 마지막으로라도 꼭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으니까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세요. 어르신들은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90세의 신기명 박사는 오늘도 영어책을 펼친다. 자신을 위한 공부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새로운 용기와 배움의 기회를 건네는 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반경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움과 봉사의 영역을 넓혀가는 삶. 신 박사의 백발은 세월의 흔적이지만, 그가 펼쳐 든 영어책은 여전히 새로운 내일을 향해 열려 있다.

“영어가 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신기명 박사. 사진=윤석룡
신기명 박사와 김정자 기자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윤석룡
신기명 박사에게 감사하는 전원곤 장로. 사진=윤석룡 
교보문고 7대 인기 영어교재 저자로 알려진 신기명 박사가 저술한 영어교육 서적. 사진=윤석룡 
을미년 새해, 덕을 쌓은 가정에 복과 길상한 기운이 가득하기를. 신기명박사에게. 사진=윤석룡